
정말 단순한 내용이다. 지하철 성추행범으로 몰린 청년이 무죄를 인정받기 위해 법정투쟁을 한다. 이게 전부. 이 단순한 내용을 화려한 영화적 기교 없이 담담하게 그려낸다. 보통 법정을 소재로 한 영화가 그러하듯 극적인 반전으로 짜릿함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끝까지 담담하고 차분하다.
그러나 그 담담하고 차분함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수오 마사유키가 그리 호락호락한 감독인가. 마땅히 화려해야 할 장면을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려내면 실패한 연출이지만, 꼭 그렇게 그려냈어야만 할 영화기 때문에 너무나 적절한 연출이며, 그만큼 지루하기는커녕 몰입하게 만든다.
궁금했다.
왜 지금 타이밍에 지하철 성추행이 소재일까?
마이클 크라이튼의 <폭로>가 한창 직장 내 성희롱이 화제가 되던 시절, 그 역 상황을 그려내 의미가 있었듯 그러한 SF적 상상력일까?
"여성이 치한을 붙잡는 데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 아세요? 무섭고 수치스럽고... 재판이 되면 법정에서 증언도 해야 돼요. 치한 범죄에서 무죄가 많이 나오면 다시 과거로 역행이에요. 이제야 겨우 재판관이 피해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는데..."
여성 변호사가 묻는다. 피고인을 변론하고 싶지 않다며 현재 성추행 사건에 대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해 준다. 그에 대한 답변.
“잘 들어, 치한 원죄 사건에는 일본 형사 재판의 문제점이 명백히 드러나 있어.”
이 대사에 이 영화의 의도가 들어가 있다.
결국, 지하철 성추행이란 소재 그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거다. 그건 단지 ‘일본 형사 재판의 문제점’이 제일 잘 드러나는 범죄라서 쓰였을 뿐이다. 지하철 성추행은 어느 쪽도 쉽게 입증하기 힘들기 때문에 자백에 의존하게 되는 범죄니까.
어떤 문제를 어떤 식으로 드러내고 싶었는가는 영화에서 충실히 설명해주므로 패스. 간만에 접하는 '꼭 챙겨 보시라.'등급의 영화.

끔찍하게 두꺼운 게 3권이나 있어 도무지 손이 안 갔지만, 막상 시작하니 술술 읽혀 편하게 봤다.
흔히 추리소설로 분류되는 모양이지만, 그보단 스릴러나 드라마로 분류될 매력을 지닌 책이다. 독자 입장에서 마땅히 추리할 요소가 없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우연에 의지하는 사건 전개와 허술한 빈틈이 꽤 있어 사실 추리 소설로는 꽝이다(제일 답답했던 건, 대체 왜 경찰은 피스를 용의 선상에 올리고도 성문분석을 의뢰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TV출연도 한 이후인데!).
단일 사건을 다루는 주제에 책이 이렇게까지 방대한 이유는 하나다. 보통 소설은 한두 명 주인공을 중심으로 사건이 돌아가며, 자연스레 주인공의 심리에만 주목하여 조연급 인물은 주인공의 심리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만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은 여러 명의 주연급은 물론이고 조연급 인물까지 배경을 일일이 묘사하며 각 개인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설득력을 높인다.
그래서 이번엔 어떤 인물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할까, 그 행동은 어떤 인물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까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또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도 탁월해 여름에 읽기에 딱 좋았다.
왜 제목이 <모방범>인가가 마지막에서야 드러나는 것도 꽤 화제를 모았었는데, 너무 기대를 한 걸까? 조금 시시했다.

지승호씨 인터뷰 책만 7권째 보는 건가 그렇다.
지승호씨는 아마 국내에 유일하지 않나 싶은 ‘전문 인터뷰어’로, 좋은 책을 여럿 펴내고 계신다. 인터뷰이가 ‘할 말이 많을 만한 화제’를 꺼내는 데 있어 참 뛰어난 것 같은데, 무엇보다 열정적으로 꾸준히 출간하시는 모습이 제일 놀랍다.
김수행 교수는 국내 마르크스 경제학(=정치경제학=비주류 경제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본론>을 완역하신 분이다. 김수행 교수가 서울대에서 정년퇴임 하실 때, 후임으로 마르크스 경제학자를 뽑지 않아 서울대 비주류 경제학의 대가 끊겼다 하여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나 스스로 진보적인 스탠스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본론> 한 번 읽지 않은 부끄러운 사람으로서, 꼭 그런 책을 안 보더라도 대충 쉽게 풀어서 누가 얘기해주면 좋겠다는 얄팍한 심정으로 책을 손에 잡았다.
우리나라에서 맑시즘이란 ‘빨갱이=공산주의=북한=소련=실패한 이론’ 정도의 인식이 대부분인 게 답답했는데, 내가 대충 아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 없어 과감하게 까질(?) 못 하다가 대가가 친절하게 알려주시니 거 참 좋구나.
인상적인 것 몇 가지를 꼽아 본다면…
1. 주류 경제학에는 ‘공황’이론이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해결해 줘야 할 텐데 공황이 어떻게 발생하느냐는 건데, 마르크스 경제학으로는 공황을 설명할 수 있다.
2. 사람들이 소련이나 동유럽의 몰락을 마르크스와 연관지어 생각하는데, 그쪽은 스탈린주의이며, 마르크스의 연구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해 나갈 것 인가까지는 다루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연구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핵심이며, 자본주의 이후의 시대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사회’로 봤다.
3. 금융산업이 위험한 이유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지 않는 산업이며, 노동자와 동떨어져 고용창출 효과 없이 거대자본만 오가기 때문이다.
4. 신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애덤 스미스는 사실 ‘보이지 않는 손’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정의와 국부를 위한 정부의 개입(거대 자본의 독점을 막는 등)도 강조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보다는 기존의 막연한 생각을 대가가 좀 더 명징한 어휘로 짚어주는 느낌을 받으며 봤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분야라서 그런지 지승호씨가 조금 버거워하지 않았나 싶은 미흡한 부분이 있어 조금 아쉬웠는데, 마지막 장에는 우석훈 교수(<88만원 세대>저자)가 참여하며 활기찬 대화가 진행되었다.

*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
<터미네이터2>는 후속작이 원작을 뛰어넘은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로 영화사의 전설이 되었다. 그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뒤를 잇는 것은 엄청난 부담으로, <터미네이터3>의 참패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사실 <터미네이터3>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못 만든 영화’의 범주와는 거리가 멀다. 그 영화는 분명히 SF 블록버스터 액션물로서 일정 이상의 완성도를 지녔다. 그럼에도 왜 그렇게 혹평을 들으며 좋지 못한 성적을 남겼을까? 나는 그 근거를 ‘혁신성’에서 찾는다. 아무리 잘 만든 영화일지언정 <터미네이터1>에서 <터미네이터2>로 넘어가며 관객에게 준 충격은 줄 수 없었기 때문이란 말이다.
<어비스>로 CG의 가능성을 보았던 제임스 카메론은 당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로봇을 창조해 냈으니 이른바 ‘액체인간’이라 불렸던 T-1000. 이놈이 바로 혁신의 중심이다. 자유자재로 모양이 변하며 어떤 인간의 흉내도 낼 수 있고 신체 모든 부위가 무기가 될 수 있으며 총알에도 끄떡없고 쇠창살도 자연스레 통과하는 T-1000! <터미네이터3>를 보러 가는 관객은 전작들이 보여준 영화로서의 완성도를 쫓아가는 것은 기본이며, T-800에서 T-1000으로 진화한 만큼 T-1000에서 무언가 더 진화한 로봇을 볼 수 있길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터미네이터3>가 보여준 T-X란 모델은 혁신적인 무언가가 아닌 T-1000의 진화형에 그쳤다. 그것도 아주 소소한 진화.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해 봤자 기계를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는 T-1000이 보여줬던 능력에 비해 비쥬얼적인 표현에서 큰 한계가 있다. 그래서 T-X를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사실 T-1000자체가 워낙 획기적이었기 때문에 대안을 제시하라면 참 막막해진다.
그래서 <터미네이터4>가 과거로 돌아간 것은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T-1000 이후를 상상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더는 시리즈를 만들지 않겠다 하기엔 세계관이 너무 매력적이며, 이야기를 끌어낼 내용상의 빈틈도 많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더 혁신적인 로봇 창조를 과감히 포기하고 더 크고 더 시원시원한 액션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을 납치하는 거대로봇, 거대로봇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바이크 로봇 등이 활개치는 시원한 SF액션물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긴박감도 좋고 다양한 구형 로봇들을 만나는 것도 즐겁다. 진부한 설정인 사이보그(인간+로봇)의 정체성 딜레마에 자신도 모른 채 프로그램된 미션을 버무려 잘 변주해 냈다.
이 이상의 미래지향적인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여전히 아쉬운 속편이겠지만, 이 정도 완성도를 지닌 영화를 그런 가혹한 기준을 들이대며 욕하는 건 잔인한 짓이다.
사족: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봤는데, 카일 리스 역이 안톤 옐친(스타트렉에서 빅또르~ 빅또르 하던 바로 그!)이었고, Common의 등장도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사족2: 내가 시나리오를 손봤다면, 마지막 존 코너의 공격에 T-800 생산라인은 죄다 파괴되어 스카이넷이 T-800을 생산하는 것은 당분간 힘들어졌다고 전제한 다음, 스카이넷이 마커스의 시체를 입수해 그것을 토대로 다시 T-800 생산에 들어간다는 내용으로 결말을 짓겠다. 이런 숙명론적으로 얽힌 관계가 이 시리즈의 매력 아닌가!
역시 나는 자르고 찌르고 그런 영화가 좋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