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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 수입 문제로 발생한 촛불시위는 역사상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그렇게 적은 성과를 얻어낸 시위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시시한 결과를 얻어냈고, 그만큼 많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 시위였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성과는 적지 않다. 20대의 암담한 정치 불감증에 비해 놀라운 정치의식을 보여준 10대가 희망이 되었으며, 정치 무관심 층의 상당수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시위대의 애초 방향이나 목적과는 무관한 부수적인 성과였고, 본질적인 목표(특정 정책이나 정권의 성향에 대한 반대) 중에 이루어 낸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인 에너지에 비해 참담하다고 밖엔 표현하기 힘들 결과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가지 문제가 가장 크게 머릿속을 맴돈다. 바로 ‘촛불의 순수성’이라는 규정이다.

촛불시위대는 늘 시민들의 평화적이고 순수하고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규정은 3가지 심각한 폐단을 낳았다.

 

1. 시위대 간의 거리감.
야자를 빠져나와 촛불을 손에 든 10대 소녀와 머리띠를 두른 채 촛불을 든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 간에는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을까. 살아온 인생이나 정치적 성향은 얼마든 다를 수 있으나 같은 목적으로 같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 간에는 거리감보다는 유대감이 더 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러했던가. ‘시민들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는 규정은 자칫 ‘촛불 소녀’와 ‘조직화되고 풍부한 시위 경험을 겪은 분들’을 단절시킬 수 있다. 그런 분들이라고 시위를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며, 다 똑같이 집에만 있기엔 욱-한 심정을 느껴 광장으로 뛰쳐나온 것인데도.

 

2. 조직화에 대한 경계.
자발적인 개인들의 모임이라는 개념은 참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전략적인 차원에서 평가하자면 그냥 ‘오합지졸’이다. 조직화를 하지 않으면 힘이 제대로 모이지도 않으며, 시위과정에서 흔히 등장하게 마련인 ‘영웅 형 리더’의 탄생도 막게 된다. 무언가 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가득 모여도, 그 에너지를 분출할 방향 제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게끔 우리가 우리 스스로 발을 묶어둔 것이다.

 

3. 비폭력에 대한 집착.
우선 촛불시위가 비폭력시위였는가에 대해 평가해 보자. 시위 기간 내내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는데 100% 완벽한 비폭력 시위라면 그건 거짓이다. 그러나 프랑스 같은 선진국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 방화와 약탈은 기본인데, 우리는 인근 편의점에 대박 수익을 내줄 만큼 평화 기조를 유지했다. 도로에 불법 주차한 경찰차량을 흔들기는 했지만, 전경과 먹을 것을 나눠 먹기도 하는 훈훈한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무장한 전경을 상대로 조직화되지도 않은 시위대가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이란 거의 없다. -_- 그런 면을 종합했을 때 촛불시위는 비폭력시위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비폭력 시위,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비폭력으로 끝난 시위와 애초에 비폭력일 수밖에 없는 시위가 얻어낼 수 있는 결과에는 차이가 있다. 비폭력 시위가 성과를 얻어내기 위한 전제 조건은 합리적인 정부다. 많은 사람이 같은 문제로 분노하고 있다는 것만 표현해도 알아서 정책을 수정할 수 있는 정부.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부자, 영남, 개신교로 대변되는 탄탄한 지지층만 바라보며 일관되게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촛불 시위가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여차하면 폭력도 저지를 수 있는 시위였어야 했다(폭력 시위가 옳으나 그르냐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루자, 성과를 얻기 위한 조건을 찾고자 할 뿐이다). 정부 입장에서 한번 바라봐 보자. 스스로 비폭력을 주창하고 시작된 시위란 무시하고 가만 놔둬도 심각한 사회적 위협이 되지 않는 시위이며, 아주 약간의 폭력사태라도 발생한다면 폭력시위로 변질되었다며 강하게 진압을 할 명분을 만들어주는 시위일 뿐이다(한나라당의 비리보다 민노당의 비리에 더 충격을 받듯, 평화 시위대는 일말의 폭력도 이미지에 큰 흠집이 된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스스로 1. 분열을 야기했으며, 2. 힘이 분산되기를 자처했으며, 3. 행동에 제약을 만든 채로 시위했었고, 언론은 신나라 이러한 규정을 받아 적으며, 이것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준엄하고 꾸짖었고, 정부는 벗어나기 시작하면 강하게 짓밟았고, 다시 우리는 스스로 순수해야 한다며 이러한 규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랑스러워했다. 시위와 관련되어 시위대와 언론과 정부의 마음이 이렇게 일치했던 부분이 또 있을까? 순수성에 대한 찬미와 그것을 벗어남에 대한 경계는 모두 한마음이 되어 짝짜꿍~ 했던 것이다.

 

정부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시위가 정부를 상대로 대체 뭘 얻을 수 있었을까?

삭제 수정 댓글
2009.08.12 10:17:19
선동
그런걸 고민하지 마시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MBC등의 편파 언론에 선동당해 촛불시위에 나간 현실을 개탄하셔야죠. 시위가 폭력성을 띠어야 한다는 님 글을 보니 참 한국이 걱정스럽습니다.
댓글
2009.08.12 13:03:23
김한빈
남의 집에다 똥은 싸지 마시길. 똥이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익명의 뒤에 숨어 떠들진 마시길. 혹시라도 본명이 '김선동' '박선동' 뭐 이런거면 죄송 ^^
댓글
2009.08.12 23:27:12
라로슈푸코
시위가 폭력성을 띠어야 한다는 글로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글이긴 합니다만,
저는 비폭력시위를 폭력, 무력으로 진압하려했던 정부를 기억합니다.
편파언론에 선동당해 촛불시위에 나간 현실을 개탄해야 한다면, 촛불시위에 나간 분들은 뭐가 되나요?
오히려, 국민의 올바른 먹거리를 졸속행정으로 불안에 떨게 만든 정부의 줏대없음을 개탄해야 할 것입니다.
댓글
2009.08.12 23:11:20
라로슈푸코
촛불시위는 정부를 상대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위협적이지 않았구나 싶지만 말이다.
나는 이 글을,
공권력이란 명분으로 치졸한 공안의 모습을 보인 정부를 상대로 설득시킬만한 파워가
촛불시위의 비폭력만으론 부족했다는 현실을 접했을때의 안타까움으로 해석하고 싶다.
댓글
2009.08.12 23:45:12
김한빈
비폭력만이 정답이라는 확신도 없고, 그렇다고 폭력시위를 선동할만큼 폭력에 대한 확신도 없다.
다만 싸움을 할 때 있어 "난 너에게 주먹질은 절대 안 할거야"라고 미리 선언하고 싸움을 시작하는 건 전략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먹질 안 쓰고 이기는게 가장 아름답겠지만, 그렇다고 먼저 나서서 그렇게 선언해 스스로 제약을 둘 건 없지 않았나 하는 거지. 그런 지적에 주먹질은 나쁜 겁니다라는 반응을 보이면 맥락을 잘못 짚은거고.
가치판단은 일단 제쳐두고 성과를 얻기 위한 전략적 최선이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해 봤다고 해석해 주렴.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말도 있지만, 폭력시위 -> 강경진압 -> 더 강한 폭력시위 -> 더 강한 강경진압 이 악순환이 계속되다 몇명 죽어 나가면, 이명박이 전두환급으로 낙인찍혀 노골적인 반정부 투쟁으로 노선이 확립되어 정권이 크게 흔들릴 수도 있었다고도 상상해 봤다. 그럼 그러한 가상의 역사는 지금 현재의 역사보다 나은 걸까? 이 경우 재임기간이 끝나기 전에 끌어내릴 가능성도 생길 수 있었겠지만 그게 옳은 걸까.

네 말대로 안타깝다 그 많은 사람들의 그 많은 에너지가 흐지부지 와해되는 걸로 끝났으니.
댓글
2009.08.22 14:44:09
고슴도치
시위하는 집단의 목적성이 확실하지 않았던게 충분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던것 같은데 결국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 행동의 결과로 무엇을 끌어내야하는지 그것이 통일되지 못했다는게 정말 안타까웠는데 말이죠. 결국 나중에 위생엔 문제없데 라던지 왜저렇게 '민폐'를 끼치고 난리야 라는 어이없는 여론에 조금씩 조금씩 흩어지는것을 보고 정말 기가막혀 했었죠 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초반에 한두번 나가고 말았던 나는 자격미달일지도
댓글
2009.08.23 01:27:07
김한빈
뭐 정권을 끌어내리고 싶어한 사람도 있었고, 대운하를 반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미국소반대 만큼은 모두가 공유한 목적이었다고 봐. 그런데 그 시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거의 '무시'에 가까웠고 전방위적 여론전을 펼치며 분열을 유도하고 강경진압을 펼치자 흐지부지 와해된 거지. 정부의 시위 대응 '전략'만 놓고 평가하자면 정말 훌륭했어. 시위대는 오합지졸이었고. 뭐 항일운동에서 민주화운동까지 쭉- 이어진 탄압 노하우가 워낙 많이 쌓였을 테니까.

상상해 보자.

 

노조에게 파업을 중단하라며 삭발식을 거행하는 회장님.
빠른 노사협상 타결을 촉구하며 단식을 시작하신 대통령각하.

 

어색하지?

 

반면 노조 지도부가 삭발하거나 단식하는 광경은 너무 많이 봐서 시큰둥하고 별로 감흥도 없지? 왜 그럴까? 노조 지도부의 머리카락이나 위장은 회장님이나 대통령각하의 그것에 비해 특별히 값어치가 떨어지거나 튼튼한 걸까?

 

간단하다. 노조가 문제를 일으키면 사측은 용역 깡패를 동원하고,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탄압’을 하면 된다. 그러나 노조에게는 그럴 의사도 힘도 없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약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의 칼끝은 항상 자신을 향한다. 자해라도 해야만 언론이 보도를 시작하고, 사측이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고, 정부가 중재를 시도하기 때문이다(비록 MB정권은 중재는 안 하고 진압만 잘하긴 하지만, 정상적인 정부는 그런 역할을 한다).

 

파업은 공격적인 수단 같지? 이런 경우도 사측은 업무방해를 근거로 노조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더 지독한 건 ‘가압류’라는 건데, 배상할 재산이 없다고 버틸까 봐 상대의 재산을 처분할 수 없도록 묶어 두는 거다. 파업할 때 노동자는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담보로 걸고 싸워야 하는 거지. 결국, 파업도 회사보다는 노동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방법이 되어 버린다.

 

이게 집시법이랑 비슷한데, ‘합법적인 파업’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손발을 묶어놓고, 어쩔 수 없이 ‘불법적인 파업’을 하면, 언론은 불법이라고 욕하고, 법원은 재산을 뺏고, 정부는 진압한다. 결국 무슨 짓을 하든 당하는 건 노동자가 되는 거다.

 

노조를 비판하기는 참 쉽다. 그네들이 법을 울타리를 넘나드는 건 비일비재하며, 때론 극심하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그들이 그렇게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기 이전에 당신은 그 사건에 관심을 뒀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었느냐고.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면, 당사자들의 절박한 심정에 공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입을 닫아라.

 

촛불시위대가 당했고, 용산이 당했고, 쌍용이 당했다. 언제쯤 그들과 당신이 하나라는 사실을 자각할래? 촛불 들던 사람들 그냥 당신 또래 친구들이고, 용산 자영업자는 당신이 단골로 배달시켜 먹는 치킨집 사장님, 퇴근길마다 들리던 도서대여점 아저씨 그런 분들이고, 쌍용 노동자는 누구나 알만한 회사 다닌다고 명절 때 거들먹거리던 친척 아저씨야. 노조활동 하려고, 시위하려고 태어난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태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 - 마르틴 니묄러

삭제 수정 댓글
2009.08.09 03:57:51
강아지똥
마르틴 니묄러 너무 팔아 먹는다는 http://blog.mintong.org/660 이런 글도 있군요
댓글
2009.08.09 11:42:25
김한빈
예 봤습니다. 넷계의 유명한 돌+I에게 인용당하다니 영광입니다. :)

창의적인 게임을 보기가 참 어렵다. 게임마다 크리에이터의 '스타일'이 살아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원인을 한 번 생각해 봤다.

 

1. 장르의 관습

 

게임 산업의 역사가 어느새 꽤 길어졌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게임들이 나오고 도태되고를 반복하면서 장르화가 진행되었고, '장르의 관습'이라는 것이 생겼다. (장르게임에 대한 생각은 예전 포스트를 참고하시라.) 대부분은 장르의 관습을 따르는 게임이 만들기도 쉽고, 유저들에게 접근하기도 쉽다. 현재 개발되는 절대다수의 게임은 특정 장르를 따르거나, 비틀거나, 덧붙이거나, 혼합하는 접근일 뿐, 장르의 공식을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2. 거대화

 

게임은 더 이상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승부할 수 있는 산업이 아니다. 그보다는 '돈 놓고 돈 먹기'에 더욱 가깝다.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개발비, 개발인원 자체가 너무나 커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실패했을 경우의 리스크가 너무나 크다. 그건 결국 만드는 입장에서 '안정성'을 중요시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된다.

 

3. 팀작업이 가지는 한계

 

2번과 연계되는 것인데, 개발팀이 거대화될 수록 '개인의 취향'은 퇴색되기 쉽다. 50명이 붙어서 조각을 깎았을 때 그것이 개성 있는 조각품보다는, 보편적인 미적 관점에만 부합하는 결과물을 낳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이야기다. 대부분은 게임을 혼자 만들지 않는다.'개인 작업'이 아닌 '팀 작업'이라는 것이 게임이 창의적이기 힘든 가장 큰 족쇄 중 하나이다.
개인이 만드는 소설, 미술, 음악의 경우 등에 비해 '개인의 취향'이 들어가기 힘든 구조인 것이다. 정말 암울한 것은 여러 사람의 취향을 다 맞추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상업주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걸 극복한 거의 유일한 사례가 영화산업인데, 이는 다시 4번으로 연결된다.
 
4. PD에 대한 신뢰 부족

 

어느 회사의 경영자도 "김PD, 자네를 믿으니까 자네 만들고 싶은 거 마음껏 만들게나. 완성될 때까지 절대로 터치하지 않겠네."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느 개발팀의 팀원도 "김PD님, 어떤 걸 만드시더라도 무조건 믿고 힘을 보태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게임PD는 자신이 만들고 싶어하는 게임을 만들면 되는 속 편한 위치가 아니다.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음을 경영자와 개발팀원들에게 끊임없이 설득시켜야 하는 피곤한 위치이다.
기존에 없던 게임을 만드는 경우와, 게임성이 검증된 기존 게임을 사례로 들 수 있는 경우 중 어느 쪽이 설득시킬 때 유리한가? 당연히 전자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고, 후자는 경영자와 개발팀원 모두가 '체험'하며 납득할 수 있다.
리니지 이후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대부분의 온라인게임들은 기존에 패키지 형태로 존재하던 게임의 게임성을 거의 그대로 온라인으로 가져온 게임들이다.
감독이 절대적인 신뢰와 권한을 가지고, 감독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영화산업이 부러운 이유가 이것이고, 그래서 나는 게임이 영화를 닮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5. 월급쟁이 개발자

 

대부분의 게임 개발자는 '회사원'이다. 회사원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노력해야 하며, 무엇보다 회사의 수익을 생각해야 하는 입장이다.
회사원이 자신의 창작욕때문에 부담스러운 모험을 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회사원이 회사가 안정적으로 수익을 올리도록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크리에이터로서의 욕심과 회사의 이익이 충돌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 때 회사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은 절대 비난받을 것이 아닌 정당한 행위이다.

 

6. 게임이 서비스라는 인식

 

온라인게임 위주의 국내 시장에서 어느새 "게임은 서비스다."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졌다. 서비스라는 말의 전제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이다. 즉, 게임에 유저의 요구가 반영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업데이트라는 방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개발팀의 지향점을 우선시 하는 개발팀과 유저의 요구를 우선시하는 운영팀 사이의 갈등(내지는 파워게임)은 대부분의 온라인 개발사에 존재할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관점에서 얘기되는 게임의 '완성도'는 유저의 요구 중 적당한 것을 수용하며 계속 가꿔나갈수록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완성도가 낮아 보이는 부분 또한, 만든이의 취향이 묻어나오는 부분이라는 것이 문제다.
상상해 보라. 피카소가 그린 입체파 그림을 보고 "이게 어떻게 사람이냐? 좀 더 사람답게 만들어라."라고 하는데 피카소가 "예, 알겠습니다."라고하며 평범한 그림으로 고쳐나가는 장면과, 예술 영화를 보다가  "이 장면 이해가 안되네? 영화가 친절해야지! 좀 쉽게 연출 바꿔 봐."라고 하면 그걸 헐리웃 영화 연출처럼 바꿔 버리는 장면을. 이런 터무니 없는 일이 게임에서는 가능하다.

댓글
2009.07.12 00:19:36
crm
아옳옳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들이 여기 다 적혀 있네효 쿜훀훀훀
댓글
2009.07.12 00:22:21
김한빈
.........얌마 이거 예전 블로그에 있던거 퍼온거야
댓글
2009.07.12 00:38:54
crm
그렇다면 저는 망각대왕 (예아)
* 게임이 가진 여러 특징 중 시각매체로서의 특징만을 전제로 함

게임 이전에 영화가 있었고, 영화 이전에 사진이 있었고, 사진 이전에 회화가 있었다.
후배들은 선배들을 보고 배운다.

영화판에서 쓰이는 용어 중 '렘브란트 조명(Rembrandt Lighting)' 이라는 것이 있다.
이름만 보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겠지만, 네덜란드 화가 Rembrandt의 스타일을 모방한 조명방식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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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렘브란트 조명인데 특징을 꼽아 보자면...
조명비(주광과 보조광 사이의 콘트라스트)가 매우 크며, 광원의 방향이 일정하고, 전체적으로 Low Key(어두운 조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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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사례: 베르메르의 부드러운 조명, 암부 디테일에 주목하면 극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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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조명을 사용한 영화 사례: Ingmar Bergman 의 Tystnaden


사진 작가 중에 Robert Capa 라는 사람이 있다. Magnum의 일원으로도 유명하고, "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라는 말로도 유명한 전쟁기자이다.
실제 전쟁 현장을 뛰어다니며 생생한 사진을 남긴 사람인데, 아래의 사진들을 보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지 않는가?



939704.jpg
071711.jpg
 598130.jpg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강렬했던 초반 전투씬은 대 놓고 이 사진을 오마쥬한 것이다. 저 느낌을 내고자 렌즈의 코팅을 벗겨내고 필름 현상법도 달리하는 등 Janusz Kaminski(촬영감독)가 고생 좀 했다더라.

그렇다면, 게임의 경우는 어떤 것이 있을까?

045666.jpg
ICO 표지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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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rgio de Chirico -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


기껏해야 표지 일러스트가 오마쥬한 이 정도 사례가 있을 뿐, 게임의 전체적인 그래픽 컨셉이 회화나 사진이나 영화를 참조한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넓게 본다면 오오카미도 포함 되겠지만)

요즘 아트디렉팅 단계에서도 차별화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데, 가끔은 선배 시각매체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어느 장르의 게임이든, 전략적인 요소를 넣고 싶을 때가 있을 수 있다. 원론적 의미에서 게임이 전략성을 가지려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 결과, 다음의 요소들이 필수적인 것 같다.

 

1. 유저에게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
2. 그 선택이 결과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3. 변수가 있어 '항상 최선인 선택'이 없어야 한다.
4. 전략적 판단에 대한 근거가 될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1번은 기초적인 요소이다. 선택권이 없는 상황에서 무슨 고민을 하는가?
2번 역시 별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요소이다.
3번이 중요한데... '언제나 정답인 루트'가 있을 경우 유저를 고민하게는 만들 수 있으나, 그건 퍼즐(내지는 퀴즈)이지 전략이 아니다.
4번의 경우, 판단의 근거가 정보로 제공되지 않는다면 고민한 결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닌, 운으로 승부하는 게임이 되므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댓글
2009.07.16 02:10:12
고슴도치
이런글 도움된다 난 기획에도 관심이 있어성 :)